오늘은 지식 공유 차원에서 버티컬 슬라이스 라는 용어 및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뭘… 만든다구?

사실 저는 이 말을 독일에서 게임 개발할 때 처음 들었습니다. 어느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오더니 무슨 … 슬라이스인가를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그게 뭐냐고 그 때 바로 물어봤어야 하는데 괜히 무식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러면 안됩니다. 모르면 물어 보는 게 제일 빠릅니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게 부끄러운 일이죠 ㅜㅜ)

전혀 생소한 단어였지만 그래도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대략 짐작이 가더군요. 

버티컬 슬라이스라는 건 말 그대로 수직으로 자른다는 말인데, 보통 케잌 가게에서 온전한 케잌을 잘라 조각으로 판매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게임 회사에서 왜 조각 케잌을?

그런데 게임을 만들다가 뜬금없이 왜 조각 케잌을 만든다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떤 케잌이 맛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전체 케잌을 다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수직 방향으로 잘라낸 일부 조각만 맛 보더라도 거기에는 케잌을 구성하는 모든 재료와 레시피가 다 갖춰져 있기 때문에 그 케잌이 어떤 맛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수평으로 자르면 안되겠죠? 그렇게 하면 위의 크림 쪽만 맛보고 아래의 초코 맛을 볼 수 없으므로 케잌 맛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마치 조각 케잌을 만들어 보듯, 현재 개발 중인 게임의 일부분만 잘 만들어서 플레이해 볼 수 있게 한다면 (예를 들어 전체 18개 레벨 중 하나의 레벨만 완성에 가깝게 만드는 겁니다), 게임 개발 및 투자에 관련된 사람들이 그 일부만 플레이해 보고도 과연 이 게임이 계속 개발할 가치가 있는 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아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버티컬 슬라이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였습니다.

버티컬 슬라이스 – 프로토타입과 다른 점이 뭐지?

여하튼 버티컬 슬라이스가 지향하는 것은 완성 버전에 최대한 가깝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프로토타입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토타입에서는 완성 버전 수준의 그래픽 완성도나 최적화된 퍼포먼스, 폴리싱(다듬기) 같은 것은 거의 고려하지 않습니다. 게임 아이디어가 과연 쓸만한 지를 최소한의 노력과 시간만 들여서 검증해 보고자 하는 것이 프로토타입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버티컬 슬라이스는 때로는 투자자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때로는 개발팀원들이 게임의 최종 버전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느낌을 공유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완성도를 중요시합니다. 따라서 목표한 초당 프레임으로 작동할 수 있게 최적화가 잘 되어야 하며 그래픽 쪽의 완성도도 높아야 합니다. 그리고 게임의 핵심 매커닉이 제대로 만들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설령 버티컬 슬라이스가 전체 18개 레벨 중 단 하나의 레벨 정도의 작은 규모라고 해도 그것을 만들기 위해 투입해야 할 노력은 절대로 18분의 1이 아닙니다. 상당히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지요.

현재 제가 해외에 나와서 일해 본 게임 회사들은 공통적으로 버티컬 슬라이스를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버티컬 슬라이스에 대해 비판적인 개발자들도 있지만, 여하튼 현재 게임 업계에서는 버티컬 슬라이스를 만드는 것이 게임 개발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한국 게임 개발사에서도 이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는지 궁금해서 구글에서 검색을 해 보니 한글로 된 검색 결과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네요. 한국 개발사들에서는 동일한 개념의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개발 프로세스에서 버티컬 슬라이스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지인들을 통해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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