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k 모뎀의 삐이삐이 소리와 함께 시작되던 세상이 있었습니다. 브리튼 은행 앞의 북적거림, “an ex por“를 외치며 순간이동하는 마법사들의 주문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드래곤의 울음소리. 1997년의 어느 늦은 밤, 우리는 브라운관 모니터 앞에 앉아 또 다른 세계의 주민이 되었습니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마저 설렘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을 기억하시나요?

신뢰와 배신 사이에서

처음 브리타니아 대륙에 발을 디딘 날을 떠올려봅니다. 서투른 손놀림으로 나무를 베고, 광석을 캐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내 캐릭터를 바라보던 그 설렘. 당시엔 그저 게임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곳은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의 무대였습니다.

가상의 집을 짓고,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되고, 때로는 배신당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현실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일찍이 맛보았습니다. 레드 플레이어를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짜릿한 긴장감, 믿었던 길드 멤버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의 배신감은 게임 속이었지만 분명히 실제였던 감정들이었죠.

PK와 현상범 추격의 추억

지금도 생생합니다. 던전 깊숙한 곳에서 몬스터와 사투를 벌이다가 갑자기 나타난 빨간 이름의 플레이어. 심장이 쿵쾅거리며 황급히 리콜 주문을 외치던 그 순간들. 때로는 성공해서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고, 때로는 그대로 당하고 말았죠.

하지만 더 짜릿했던 건 현상범을 쫓는 일이었습니다. 길드 멤버들과 함께 오렌지나 레드 플레이어의 흔적을 따라 브리타니아 곳곳을 누비던 밤들. 마침내 그들을 찾아냈을 때의 성취감,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했을 때의 환호성. 그 모든 것이 우리만의 서사시였습니다.

시간이 선물해준 진실

지금 돌이켜보니, 울티마 온라인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은 레벨이나 아이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느린 시간’이었습니다. 스킬을 올리기 위해 몇 시간씩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그 시간, 길드 동료들과 별다른 목적 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들.

요즘처럼 모든 것이 빠르고 효율적인 세상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여유로움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기다림이 지루함이 아니라 기대감이었고, 작은 성취조차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느린 시간 속에서 진짜 자신과, 그리고 진짜 관계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느린 친밀감

이것을 저는 ‘느린 친밀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울티마 온라인에서 형성된 관계들은 인스턴트 메신저의 빠른 대화나 소셜미디어의 가벼운 소통과는 달랐습니다. 함께 위험을 헤쳐나가고, 서로의 실수를 감싸주며,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쌓아올린 신뢰였습니다.

그 친밀감은 급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캐릭터 뒤에 숨어있는 진짜 사람을 알아가는 것, 그리고 내 진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는 것. 그 모든 것이 지금 시대가 잃어버린 소중한 방식의 소통이었습니다.

같은 꿈을 꾸었던 우리에게

브리타니아의 오래된 주민이었던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함께 보낸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고. 당시에는 ‘게임’이라고 불렸지만, 사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디지털 공간에서도 진정한 우정과 배려, 그리고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혹시 당신도 가끔 그리워하나요? 첫 집을 지었을 때의 설렘을, 길드 회관에서 함께 웃던 밤들을, 그리고 PK의 습격에도 굴복하지 않던 우리의 용기를. 그 모든 경험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디지털 세상에서도 진심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 가상의 공간에서도 진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때 배운 것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느린 친밀감의 소중함을, 서로를 돌보는 마음을,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용기를.

울티마 온라인은 끝났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나눈 마음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어떤 형태로든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때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그 아름다운 경험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기를.